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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LL YOUR DARLINGS

불온하고 불안한 날의 초상 

written by. 하제 @bamgomm

          히카르도는 수동타자기 위에 손을 올린 상태로 잠시 멈칫했다. 자신이 지금, 하고자 하는 행동이 맞는지 의심스러웠고, 어떻게 해야할지 혼란스러웠기 때문이다. 계속 망설이고, 또 망설였다. 사리분별을 하지 못하는 나이가 아님에도, 그래도 혼란스러웠다. 그가 과연 정말 살인을 하려고 했던 것일까. 아니, 어쩔 수 없던 것인지도 모른다. 손에 들린 담배를 보고서 히카르도는 자수정 눈동자를 굴렸다. 히카르도는 혼란스러운 제 머리를 정돈하기 위해 수동타자기에서 손을 떼었다.

벨져는 릭의 손을 묶었다. 아니, 묶었었다. 제 옷을 벗어냈었지. 아니, 벗어냈었다.

히카르도의 큰 등이 굽었다. 고개가 좌우로 조금씩 움직인다. 수동타자기 위의 손가락은 쉽게 움직여지지 않는다. 크고, 거칠게 숨을 쉰다. 하지만 숨은 조금씩 안정이 되어간다, 아마도.

시간을 되돌리자. 릭에게 꼽혔던 벨져의 칼이 다시 벨져의 손으로 돌아간다. 릭에게서 터져나온 피가 다시 그의 내부로 빨려들어간다.

히카르도는 숨을 다시 몰아쉬었다.

벨져의 어깨에 손을 올린 릭, 두 사람은 모두 흥분을 한 상태다, 그리고 이를 악문 릭 톰슨. 히카르도가 벨져를 거울 너머로 훔쳐봐 문을 닫았던 릭이 다시 문을 연다. 눈을 내리 깐 벨져의 어깨 위에 조심스럽게 올려진 릭 톰슨의 손.

그리고, 수동타자기를 입력하기 위해 엔터를 한 번 눌렀다. 챡, 깔끔한 소리와 함께 히카르도의 입술이 굳게 닫혀있다. 속도, 머리도 아주 복잡했다. 속에 무언가 큰 돌덩이가 앉아 소화가 되지도 내려가지도 않는다. 잘게 바스라질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히카르도는 발을 바닥에 내려 붙였다. 수동타자기를 힘있게 한 자 한 자 치기 시작했다. 이것은 예술의 혁명을 위한 글쓰기가 아니었다. 히카르도의 손에 붙게 된 수동타자기엔 어떠한 선동도 거짓도 미화도 없다.

 

그는 널 사랑했어. 그리고, 사실 한 때 너도......

 

히카르도는 수동타자기 위에서 다시 잠시 손을 허공에 띄운 채 멈추곤 눈을 감았다. 제 손에 잡혔던 사진에선 벨져와, 벨져가 그토록 벗어나고자 했던 릭이 같이 찍은 사진이 있었다. The best day. 손에 각인처럼 만져졌던 그 문장을 히카르도는 잊지 못한다. 그건 릭 또한, 벨져 또한 마찬가지일 것이다. 히카르도의 손이 다시 움직였다.

 

그를 사랑했었고.

히카르도의 눈동자 위로 스치는 릭은 아주 절박했다. 난 그대가 필요해. 발걸음이 빠르고, 거칠게 손을 털어내는 벨져의 뒤를 빠른 걸음으로 같이 따르고 있다.

 

하지만 비밀이 널 잠식했다.

벨져는 짜증이 섞인 물기 젖은 목소리로 외쳤다. 넌 아직 어렸던 날 호모로 만들었잖아! 히카르도는 제 눈가 대신 수동타자기를 쓸듯 타자를 쳤다.

 

그래서 넌 그날 자살 시도를 했지.

 

벨져의 말에 상처를 입은 듯한 얼굴을 한 릭이 노성터진 목소리로 답하듯 외쳤다. 어떻게 그런 말을 하시오? 우린 사랑했잖아. 릭은 벨져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벨져를 살렸다.

 

그가 너를 구했고.

 

릭은 고집 부리듯 입술을 물며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난 우리 사이 포기 못해.

 

히카르도는 천천히, 하지만 유연하게 타자기를 쳤다. 그가 네 목숨을 구했지.

 

벨져는 그런 릭을 보며 제 입술을 몇 번이고 달싹이다 혐오 어린 표정을 지어냈다. 구질구질해. 아마 벨져도 이 말을 내뱉기까지 그 오랜 시간 릭을 보아오며 힘겨워 하지 않았을까. 자괴감과 자기 혐오에 휩싸여 아무것도 못하고 그저 자신을 잃으려고 했던 벨져 홀든. 그는 그대로 돌아서서 릭에게서 도망치려 하지만, 순간 벨져를 잃을까봐서의 공포와 분노에 휩싸인 릭이 그대로 벨져의 입을 막고 힘으로 그를 제압하려 든다. 벨져는 그대로 입이 막히고, 릭이 바지버클을 만지는 손을 쳐내며 그를 벗어나려 몸싸움을 한다. 사람은 극한으로 몰리면 도덕성을 상실하고, 평소 하지 않던 짓을 행한다고 했다. 릭 톰슨은 지금 그런 것이다. 벨져는 품에 안고 있던 휴대용 나이프를 꺼내들었다. 릭과 벨져의 시선이 교차한다. 시선은 과거에 맞물렸던 서로의 숨처럼 얽혀있다.

 

그가 널 원하는 만큼 너도 그를 사랑했어.

 

경계하는 눈빛. 릭은 그런 벨져를 보며 고개를 작게 털었다. 릭은 자조했다. 그때 어떤 기분이었는지 알 것 같아. 릭의 입술에서 샌 말에 벨져가 의아했다. 언제. 질문이었지만 질문은 아니었다. 그대가 죽으려 했을 때. 릭의 눈은 빨갛다. 곧 울음을 터르릴 것도 같은 얼굴이다. 눈가도 젖어있지만, 그는 울음을 터트릴 것 같지 않았다. 오히려, 이 상황을 타파하고 싶은 것 같았다. 말도 안 되는 이 상황을 부수고 싶은 것 같기도 했다.


릭은 결심한 건지 입을 열었다. 죽이시오. 여전히 제게 칼을 겨눈 벨져에게 다가갔다. 한 발짝, 한 발짝, 벨져는 그런 릭에게서 물러서지 않았다. 하지만 벨져는 두려운 것 같기도 했다. 눈에서, 행동에서 릭의 죽음에 대한 공포가 서려있기도 했다. 어서. 릭은 벨져에게 더욱 다가간다. 벨져가 찌를 기미가 없어 보이는지, 자신이 먼저 칼에 뛰어들어 폐를 찔러낸다. 고통에 입을 벌리던 릭이 벨져를 보자, 벨져는 결심했다는 듯 입을 다물고서 릭의 폐에 칼을 더 찔러넣는다. 찔러넣으며 거칠게 숨을 몰아쉰 벨져가 다시 뒤로 물러난다. 그리고 다시 손을 뻗어 릭의 심장을 찔러낸다. 릭은 그 급작스러운 공격에 놀란 듯 눈을 크게 뜨며 찔린 곳을 손으로 막지만, 다시 벨져가 달려들어 두어 번 더 찔러낸다. 릭이 고통스러운 소리를 내지만, 소리를 죽이듯 내었을 뿐이다. 마지막으로 칼을 찔렀을 때, 벨져와 릭의 시선이 맞닿는다. 어떤 기분일까. 고통에 다리가 풀린 릭이 주저앉고, 벨져는 칼을 든 채로 서있다.

 

히카르도는 덤덤하게 수동타자기를 친다. 더 이상 망설임은 없다. 첫 단추만 꿰기 힘들었던 것뿐이다.

 

벨져는 릭의 시체를 가지고 바다에 간다. 찔린 릭을 끌어 바다 안으로 들어간다. 벨져는 한때 연인이고 사랑했던 릭을 안고 있다. 릭은 여러 번 칼에 찔린 고통으로 인해 몸을 가누지 못한다. 벨져가 안아들어 바다에 천천히 내려놓을 순간마다 퍼지는 피는 과거, 그들의 사랑을 풀어내린 릭의 순애보가 아니었을까. 벨져의 무엇이든 사랑하고 감싸주며 포용하고 인내를 가졌던 릭의 그 묵혀왔던 사랑들이 벨져에게 마지막까지 전해져 흘러들어가길 바라면서 말이다. 벨져는 얼굴을 일그러 뜨렸다.

 

어떤 것들은, 한 번 사랑하면 영원히 내 것이 된다.
아무리 놓으려 해도 다시 돌고 돌아 내 곁으로 온다. 내 일부가 돼 버리는 것이다.

 

 

아님, 날 파괴하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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